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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ing/Healing

비루함

비루함

ABJECTIO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노예의식


비루함(abjectio)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것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자신을 비하하는 감정보다 우리 삶에 더 치명적인 것도 없다. 스스로 비하하니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란 감정은 강한 자존감 없이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루한 삶'은 결코 살 만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비루함의 감정, 혹은 그런 정조를 강하게 띠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는 대부분 유년 시절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가 비루함을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의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슬픔'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가 칭찬보다는 비난과 험담을 일삼았다면, 우리는 성장해서도 항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른 부모를 만났다면 충분히 칭찬받고도 남을 일을 했는데도 자신의 부모는 매정하게 그것을 폄하하곤 했다면 말이다. 


"공부는 잘해서 뭐하니, 인간이 되어야지." 

"너는 엄마를 닮아서 구제불능이야, 피가 어디 가겠니.”


이런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들었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 대해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잘해도 비난을 받는다면 ,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무가치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슬픔의 정조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유년시절에 만들어진 슬픔이 하나의 습관처럼 내면화될 때, 우리는 자신을 항상 비하하는 감정, 즉 비루함에 젖어들게 된다. 습관화된 슬픔, 혹은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슬픔, 그것이 비루함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그만큼 비루함은 벗어던지기 힘든 감정이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애정과 칭찬이 있다면, 비루함도 조금씩 사라질 수 있다. 자신을 쉽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 오랜 시절 만들어진 습관화된 슬픔을 그만큼 시간을 들여서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 즉 봄 햇살이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을 녹이는 것처럼 그렇게 비루함이라는 고질적인 슬픔을 천천히 치유해줄 사람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만이 비루함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법이니까.


강신주의 『감정수업』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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